교회를 준비하며

교회를 준비하며

교회를 준비하며

어느 덧 4월이다.

그동안 교회는 노회의 교회 허락 등 행정적인 여러 일들을 진행 중이다.

오히려 준비와 개척보다 실제 노회의 교회 허락과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도 반드시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여러분들이 교회에 예배에 함께 해주셔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

 

홈페이지 업데이트는 아무래도 교회의 행정적인 절차가 끝나는 즈음에 맞춰

새롭게 단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홈페이지는 오래된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교회의 정보등 간단한 수정도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정보는 올릴 수 있지만 수정이 되지 않는 등

한번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일단은

진행될 행정적인 절차와 수순을 밟고

상황에 맞춰서 웹사이트도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2월을 시작하며

2월1일로 계약을 완료하고 예배를 드렸다.

몇 분이 참석하여 용기와 지지를 해주셨다.

 

작은 공간이지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고

더불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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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3일 2월 건물 계약을 앞두고

고촌 지역에서 교회를 시작한다.

 

풍무동에 있으려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았다. 

조정이 안되거나 비용이 안맞거나 교회를 거부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풍무동에 있기가 어려웠다.

 

고촌의 건물은 기존에 교회가 있던 곳이라

비용을 주더라도(시설비용) 갈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교회가 일정한 부분을 양보해줘서 개척교회의 입장을 잘 살펴 주었다.

 

2월1일부로 가계약된 것을 본계약으로 바꾼다.

잔금치루는 것이다. 보증금과 앞으로의 월세 계획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과의 약속이다. 교회라는 간판은 그런 것이다. 

어려움에 있다하더라도 약속된 것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세상 만큼 해서는 세상 밖에 안되지만 

세상의 기준도 지금의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이 있고 계약은 당사자가 지켜야 할 분명한 약속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충실하게 지켜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년 12월

6월 교회 사역을 마무리하고 

7월부터는 시작이다.

 

교인(?)에게 3가지를 약속했다.

1.  25-30분 설교 시간 지키겠다.

2. 잔소리하지 않겠다.

3. 준비된 말(텍스트)만 하겠다.

 

덕분에 나도 훈련을 스스로하고 약속으로 인해 교인들도 아직까지 잘 견디고 있다. ㅋㅋ

7월이 지나고 마음은 편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분열 !

5년간 함께 했던 교회의 어이없는 폐쇄 조치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그런 와중에 나의 준비의 궤도는 이들의 요구와 맞물리며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나의 길은 나의 길이다. 

물론 어떤 길이 만나는 지점도 있을 수 있고 교차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심 길이 있어야 하듯 오랜 시간 준비한 나의 길은 그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중심이 되어 다른 길이 붙든지, 갈라지든지 할 것이다.

 

아무튼 길었던 공부의 길은 목회의 길로 연장된다.

그 연결점은 7월부터의 '요한복음 강해'이다. 

공부의 요한복음이 목회의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맛이다.

요리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복음'이라는 핵심 가치를 어떻게 '요리'하는가는

공부와 다른 길이다. 

 

위에 1, 2, 3는 나름의 경계선이다.

페북에 단순 명제를 기록했다. 

'복음은 커피의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맛'이지만

성도들에게 '진한 에스프레소는 즐기는 맛이 아니라 피할 맛'이다.

 

물에 탄 아메리카노는 즐겨 마시지만 에스프레소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진함이 흐려졌다고 한 잔이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커피를 즐기고 진한 맛을 자연스럽게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친절한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1, 2, 3을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내가 걸어온 오랜 시간의 '신학의 길'이 지금 돌아보면 주마등 속에 한 장면처럼 쉽게 보인다고

앉아서 듣는 이들에게 '쉬운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궁금한 것은 내가 마시는 한잔의 커피에 대한 이해이지

커피를 만드는 나의 모습은 가끔, 어쩌다 한 번이면 족한 것이다.

결국 아메리카노를 즐기다 다양하게 즐기다 에스프레소를 도전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소수의 인원에게도 소수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숙제를 풀어내는 힘을 가져야 하다. 

하지만 흘러가는 물을 막듯 갈들을 만들지 말고 둘러가게 해도 물은 길을 낸다.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능하심을 바라봅니다. 아멘


2023년 6월

이제 석사과정(신약신학)도 마무리되어 간다. 

논문은 지도교수님의 지도 아래 마무리되어가고 학기도 마무리된다.

 

갑작스런 변화이겠지만

꽃 망울은 하룻밤 사이에 피어나듯 터진다.

 

지난 주 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사실 나의 의도보다는 밀린 듯한 느낌이지만 머뭇거리는 나에게는 적절한 동기 유발은 분명하다.

 

한순간 당황으로 그동안 써왔던 이곳의 교회됨에 대한 생각보다

급한 마음에 결정하려는 일들을 잘 정리해준 고마운 분들이 옆에 계셔서 좋다.

 

'급할 것 없다'

'그동안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살펴라'

 

마음은 급하지만 발을 딛는 순간의 흔들림은 당연한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훈련한 결과는 그런 흔들림을 굳게하고 도약하게 할 것이다.


2023년 4월

저는 마지막 th.m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신약신학 석사 과정을 마무리합니다.

 

논문이 패스되면 신약신학 석사가 되는 것이고.

패스 하지 못한 채 졸업을 한다면 신약신학 과정 이수가 되겠죠. ^^

 

저의 전공은 요한복음입니다. 

 

그 사이 강도사로 타 교회에서 사역하는 중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설교 사역과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지역에서 독서모임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병행이 쉽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벌써 학기 중반으로 넘어갔습니다.

논문과 학기를 마무리하면 구체적인 교회의 모습도 진행될 것 같은데

두고 봐야겠죠. ^^

 


2022년 9월

22년 9월

 

간만에 소식을 올립니다. 

Th.m 신약석사 3학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내년 마지막 학차에 논문을 써야 하지만 지도 교수님의 배려로 이번 학기부터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연구를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여름에도 좀 시간 없이 보냈는데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 사이 제가 사는 동네를 중심으로 이러저러한 정보를 체크하고 준비하면서 

한 스텝 나가는 중입니다. 

 

 


22년 3월

어느 정도의 가닥을 잡았다.
교회를 그리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경비의 조달 등을 잘 정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문 열어 놓고 기다리는 방법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함께 이끌고갈 멤버가 제일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누가 그리고 누구를 참여 시킬수 있을까.

다행히 이런 경험이 있는 분의 조언을 통해 개척에 말려 시작부터 월세 감당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번 달은 이를 보다 구체화 시켜 준비를 해야 한다.

2학차를 맞는 Th.m 과정도 버겁다. 그래서 차분하게 진행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더 급할건 없다.

5월과 11월에 목사고시가 있는데 아무래도 11월이나 내년까지 봐야 할 것 같다.

참고로 목사는 목회를 할 경우 노회가 고시를 통해 자격을 준다. 그러니 다른 교회에 사역을 하거나 (같은 교단 내) 개척 후 일정한 교인이 있어야 노회 청원을 통해 고시 자격을 부여 받는 것이다. 최근에는 다른 방법들로 목사가 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장로교 전통적인 방법은 아니다.

현실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 생각이 든다.  현실성이란 그렇게 여러 생각이 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학생이 학교를 가는 것은 현실성이 아닐 수 있다. 눈 뜨면 가야하고 할 걸 해야 한다는 면에서는 그렇다. 현실적으로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지만 현실성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를 세운다는 현실성은 결국 돈과 연결이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의 문맥에는 마음 먹으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규모를 적게 하든지 빚을 내어서 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식으로 하면야 못할게 뭐 있을까 싶지만 여기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설립하고 운영계획이 무엇이고 그래서 어디를 바라보고 갈 것인가 하는 보다 세밀한 계획과 지금의 상황을 무시한 체 덜컥 저질러 놓고 믿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도 일을 할 때 셈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한다. 셈에는 무엇을 공통분모로 둘 것인가에 대해서 잘 고민해야 한다.비영리 단체인 교회가 지금의 코로나19상황에서 세상이라는 곳에서 견디려면 보다 지혜롭게 때를 기다려야 한다.

 

먼저는 제일 좋은 방법은 함께 가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몇몇이 힘을 보태서 함께하면 여러 도움이 된다. 먼저 비용과 운영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 교회는 대부분 소형(10명 미만) 또는 준소형(20명 미만)을 보고 계획을 한다. 하지만 지역교회의 특성은 상가 교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소.준형은 보증금1천~2천의 규모에 월세가 80-150까지 잡혀 있다. 매월 월세를 감당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세울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건 2차적인 문제다. 가능하면 현실에 맞게 2-3교회가 함께 세워지면 바람직해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가 수.일 사용하면서 그만한 비용을 지급하는 문제가 결코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세상기준이라는 말로 두 기준을 세우는데 이는 잘못된 사용이다. 그런 교회기준과 세상기준이라고 잣대를 가지고 있으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식이라면 많은 소규모교회가 다 세워져야 하는데 현실이 어디 그런가. 지금 대부분의 소형교회들은 보증금을 까먹고 있는 현실에 있기 때문에 이는 적극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2-3교회가 힘을 합쳐 한 지붕 세 가족으로 각자의 필요를 따라 자유롭게 운영하고 특히 인력 차원에서 서로에게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 3명이 보이면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관련 기술과 전통적으로 반주와 찬양 등이 기본이로 인식되지만 목회자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동역의 개념에서는 서로가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가능하면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을 생각해야 한다. 건물주에게 월세를 지급해야하는 것이 계약이다. 현재 100만원을 월세로 쓴다면 이는은행이자로 3억 이상을 쓸 수 있는 비용이다. 물론 빌리려는 조건의 문제도 있지만 그건 차치하고라도 비용상 효율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덜컥 계약을 해놓고 밑도 끝도 없이 월세 감당이 되지 못한 상황이 몰려서는 안 된다. 특히 이런 경우 목회자 스스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불가피하게 만들 수 있다. 처음부터 일을 하던 경우라면 어느 정도 발란스있게 가능하다. 하지만 순서가 바껴 운영을 위해 일로 나서게 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어떤 일을 하면 월2-3백만원의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일의 질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수 있다.  혼자서야 무슨 문제랴 자기 일이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따라오라고 하기전에 따라 갈만한 충분한 명분이 성경적 근거에서 올바른 모습이어야 한다. 

 

더 할 말이 있지만 // 2-3교회가 전세 또는 구매비용으로 월세보다는 은행이자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설립되고 또한 월 부담을 줄여서 실제적부담을 줄이고 2-3 사람과 인력을 감당할 수 있다면 충분한 가능성을 두고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작하고 월세에 치여버리는 경주가 아니라 하고 싶어했던 교회를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기회를 얻어야 그나마도 경쟁선상에서 달려볼 것이라 판단된다.

 

가장 베스트하지는 못해도 나쁜 방향으로 뛰어서는 안 된다.


현재 준비사항을 점검하면

내가 소속된 교단은 먼저 교회가 되기 위해 10명의 세례교인 구성이 기본이다.

이제 시작하는 것이기에 소규모 모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구래동에 작은 모임이 가능한 장소를 마련했다. (아마 1년간 운영 후 본격적인 교회 설립으로 갈 것으로 예상한다.)

2. 아라동에 모임 가능한 장소 물색과 평일 사용 여부를 확인 중에 있다. (주중에 학원으로 사용가능하다면 어떤 학원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기타...

교회 유지 운영이 매월 100-150만원에 이루어진다.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마련하고 운영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코19 상황이기 때문에 모임이 원할하지 않기 때문이다. 

 

1. 보증금을 빌리고 이를 매월 이자 + 운영비 가능할까? 쉽지 않다.

2. 전세로 입주가 된다면 전제 자금에 대한 이자금은 오히려 가능하다. 월 100만원이면 3억에 3%라 해도 9백이면 월 1백이 안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무엇일까?

하우어워스가 이런 말을 했다. “탐욕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우리의 의지로 계명에 충실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능적 탐심과 현대 경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탐욕을 집요하게 부추기는 세력에 맞서려면 교회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아이를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한 번 가보라. 사고 싶은 게 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탐욕에 대한 훈련을 충실하게 받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의 아이가 이 세상의 유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거면 됐어요!’라고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그 아이를 꼭 필요한 것을 적당하게 원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훈련받도록 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한다.”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며

코로나 시대의 정점을 지나고 있다.

 

백신으로 인해 일부의 국민들이 접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3월2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개학은 여전히 위협 속에서 진행된다.

나도 3월2일 마지막 학기를 시작한다.

 

그동안 5학차 동안 열심히 들었는지 남은 과목수는 몇 과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졸업고사 등 쉽지 않는 선택들이 남아있다. 

 

코로나 전에 21년이면 교회를 함께 세워가야겠다는 목표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왔다.

물론 코로나라는 상황은 변수가 맞다. 그렇지만 이럴 때 본질은 더 선명한게 아닌가 생각든다.

남은 학기의 공부는 아마도 그런 과정을 찾아가는 시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15년부터의 긴 여정...

여전히 인생은 여정의 일부이고 공부함의 긴 여정 조차도 내 인생의 일부이다.

그 사이 살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벌써 2021년 ~~

새롭게 새해를 맞이 했고 21년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해이기도 하다.

 

계획이 다 뜻대로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은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긴 시간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끝도 이제는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코로나 19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의 준비도 끝난건 아니다. 

 

한 가지를 끝내면 또 한 가지를 해결한다. 

급한 건 없다. 교회를 세우는 일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닌 걸 안다. 

문을 열어 놓고 (사실 홈페이지를 통해서 열어 놓은 것이지만)  사람들이 들려보고 자기 마음에 맞으면 잠시 거처를 틀다가 다시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다음 차례로 넘어가는 모습... 그동안 많이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준비를 하면서 사역을 2년째하고 있다. 

교회의 드나드는 성도들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물론 자기 마음에 안맞거나 교회의 분위기나 목표하는 지점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일면 이해가 된다.

 

그래서 나 역시도 그 방향을 정해보고 지난 시간 나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는지 상황을 살피며 정립해 가는 시간이다.

 

글을 보니 꽤 오랜 시간을 공백처럼 보이겠지만 나름 바쁘게 자신을 성숙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의 수업은 비대면이라 수월해보여도 해야 할 일도 과제도 많았고

교회는 비대면으로 다양한 장비의 활용 등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주변의 환경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김포 내가 사는 동네는 투기 세력이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예전과 같은 동네의 개념은 사라졌다.

아파트의 위치에 따라서도 경계가 있는 듯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소속감을 원하고 있다. 

 

마을이라는 단어 자체가 '촌', '구식', '옛날'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서도 '정', '이해', '다정'과 같은 느낌을 포함하기도 한다. 

대부분이 거주지를 정하지 못한다. 유목민의 삶이다 보니 서로의 마음을 주는 일에 서툴다.

 

그러니 여기에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벌써 2021년 ~~

새롭게 새해를 맞이 했고 21년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해이기도 하다.

 

계획이 다 뜻대로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은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긴 시간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끝도 이제는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코로나 19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의 준비도 끝난건 아니다. 

 

한 가지를 끝내면 또 한 가지를 해결한다. 

급한 건 없다. 교회를 세우는 일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닌 걸 안다. 

문을 열어 놓고 (사실 홈페이지를 통해서 열어 놓은 것이지만)  사람들이 들려보고 자기 마음에 맞으면 잠시 거처를 틀다가 다시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다음 차례로 넘어가는 모습... 그동안 많이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준비를 하면서 사역을 2년째하고 있다. 

교회의 드나드는 성도들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물론 자기 마음에 안맞거나 교회의 분위기나 목표하는 지점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일면 이해가 된다.

 

그래서 나 역시도 그 방향을 정해보고 지난 시간 나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는지 상황을 살피며 정립해 가는 시간이다.

 

글을 보니 꽤 오랜 시간을 공백처럼 보이겠지만 나름 바쁘게 자신을 성숙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의 수업은 비대면이라 수월해보여도 해야 할 일도 과제도 많았고

교회는 비대면으로 다양한 장비의 활용 등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주변의 환경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김포 내가 사는 동네는 투기 세력이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예전과 같은 동네의 개념은 사라졌다.

아파트의 위치에 따라서도 경계가 있는 듯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소속감을 원하고 있다. 

 

마을이라는 단어 자체가 '촌', '구식', '옛날'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서도 '정', '이해', '다정'과 같은 느낌을 포함하기도 한다. 

대부분이 거주지를 정하지 못한다. 유목민의 삶이다 보니 서로의 마음을 주는 일에 서툴다.

 

그러니 여기에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짧고도 긴 시간의 터널

어찌 될지도 모르는 긴 터널을 지난다.

 

코로나 19로 시작된 오늘은 사회에 어두움, 두려움이라는 긴 꼬리를 드러내며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소망'보다는 주일 예배에 대한 내부의 갈등에 힘들어 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실체를 부인하며 재수없으면 걸리는 정도의 안일한 의식에 사회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4월 15일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급한 소리로 사과에 정신없이 눈치만 살피는 시간도 오늘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고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이 시대에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가하는 자문이다. 그런 경계는 사라지고 오히려 사회에 문제 요인으로 보이는 시각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일까?

다행히 한국 사회의 긴 터널은 그 끝이 아닐까 '소망'한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시간에 모두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넘나드는 상황이 자유일까? 그렇지 않다. 생명 존속, 사회 시스템의 존속을 앞두고 '검역'이라는 무서움은 우리 주변을 벗어나면 여전히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이번 질병은 '질서'와 '기본'이 가장 강력한 '처방'이다.


2020년을 - 정답과 해답 -

이번 겨울 시즌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봅니다.

 

오히려 길을 찾기보단 생각이 복잡합니다. 다양한 생각을 가졌으니 그렇겠죠. 

이해하고 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그렇잖아요. 연습없는 거죠.

 

물론 답을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생이 그런가요. 정해진 것을 답이라고는 하지만 정답보다는 해답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답을 이야기할까요? 해답을 이야기할까요?

 

정답은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에 정해진 것으로 봅니다.

너무 옳은 것을 우리는 미워합니다. 좀 흟트러진 상태를 원합니다. 그것을 인간미있다고 말합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 화살은 요동을 칩니다.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요즘 더 잘보입니다. 그렇게 진동하며 포물선을 그리며 날라갑니다. 그리고 용케도 과녁을 맞춥니다. 

마치 정해진 방향으로 시위를 떠난 화살이라고 생각하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며 날라가는 거죠.

 

어쩌면 이런 흔들림이 인간미라 해볼 수 있을까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은 인생의 포물선이라 해볼 수 있겠죠.

이런 표현이 마치 인생이 정해진 운명처럼 보이나요.

 

그런데 매일 한 번씩 쏜다고 생각한다면 정해진 운명보다는 그 과녁지에 쌓인 그것이 각자의 인생일 것입니다. 

 


항상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칭의에 문제 '내가 믿습니다'는 고민이 아니다.

이미 그 믿음으로 어떻게 사는가이다.

 

이는 '너가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의 문제이다.

이는 쉽게 점검의 문제일수도 있고, 자신의 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일수도 있다.

 

내가 믿습니다는 곧 내가 그 믿음대로 행하는 것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맑은 날을 기도하면서도 우산을 들고 나가고 비를 기대하면서도 우산 없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마치 이것이 '이 병이 나은 줄 믿습니다' 같은 기적적인 은사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믿음의 행함은 나오는 것이다. 

당신이 구원받았습니까? 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라 그렇다면 구원받은 행동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몇몇 신학적 행간이 있다.


늘 본질이지만 상황과 여건이 있다.

 

나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여기에 왔다.

하지만 사람들을 볼 때 본질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예로, 어느 식품을 잘 아는 것 같아도 뒷면에 붙은 작은 글들을 읽지 않는 것과 같다.

 

아니 읽더라도 그런 것들이 인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어련히 잘 만들었을라 믿거나 그동안 써봤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하거나

누가 쓰고 있으니 좋은거라 한다.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거나 무조건 싸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도 그렇다.

 

물론 나 역시 지금의 교회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복음의 올바른 본질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막상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 보면 그들처럼 잘못된 하나 하나를 찾고 바르게 하려는 생각보다 가성비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될까 같은 것들에 생각이 팔린다.

 

때론 비용이 얼마나 들지 고민을 한다든지,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든지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누굴 탓할 것도 없이 타락한 인생은 한 시라도 깨어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자신을 깨워 올바른 방향으로 달려내지 못한다.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

내 생각도 처음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


계속 생각하는 고민은?

처음에는 교회의 중심을 아이들에게 두고 싶었다.

 

아이들을 중심하는 예배에 어른들이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크게 변한건 없다.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아이들은 말 그대로 새 희망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쳐 세운다면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세상이라는 곳에선 20-30만원하는 학원에 투자를 한다.

그에 비하면 아이의 인생에 대한 투자는 잘 못한다.

 

몰라서이고 어떻게 할지 몰라서다.

최근 조국후보자의 딸이 황제 컨설팅이다. 특혜다. 하는 뉴스로 전국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사실 관계한 뉴스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이 들끓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가진 자'에 대한

편견 또는 불만이 무분별하게 정치감정과 뒤섞여 분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그렇다면 인생의 전체를 두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가?

결국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른이 먼저인 셈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언덕위에 위치한 교회?

 

예전에는 교회가 동네의 언덕위에 위치를 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당시 사람들이 나름대로 성경에 나오는 표현대로 언덕위에 교회를 세웠던 것 같다.

 

물론 의미를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당시 높지 않는 건물들 틈에서 높은 교회의 종탑은 어디서나 보이는 일종의 '신성'함 비슷한 것이었다.

마치 마을 입구를 차지한 장승같은 수호의 개념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선점하면 그 마을은 장승을 없애야 하고 우상을 없애는 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랬지만 오늘은 어떤가 오히려 그렇게 없어진 장승들은 일종의 상징이 되어 오히려 그때보다 더 큰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면 눈에 보이는 것에 의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역하는 교회에 오는 시간에 지나는 버스의 풍경을 보면 다양한 생각을 한다.

걸어 오는 사람을 중심하면 상가교회를 하거나

조금 떨어진 곳에 교회가 있다면 차를 이용해야 하거나 등 여러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교회는 진정 무엇일까?

오늘도 마을이라는 일종의 공동체가 있는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생각을 한다. 

 

상가에서 개척한 교회는 성도들이 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건물 교회로 이사하며

그동안 함께하던 이들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핵심 멤버니 하면서 결국 교회를 따라 수십 가정이 교회를 중심으로 함께 이사를 하는 진풍경도 벌어지기도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닌 오늘의 현실의 문제일 것이다.

조물주 보다 높다 하는 건물주의 위세나 그렇다고 상가에서 수십년을 그 인원으로 견뎌내는 어느 목회자의 고단한 삶도 있다. 이것이 오늘 살고 있는 무시 못할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마을에 영향을 미친다. 곧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오늘 삶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해관계가 농경사회나 집단적 공단이나 작업 중심도 아니다. 대체적으로 비용을 중심으로 아파트의 가격이나 동네의 형성에 따라 입주민, 원주민등으로 분류되면 사는 형태다. 

물론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지만 이런 이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솔직히 여러 형태의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있지만 어디 그런가?

교회도 일종의 비용 단체다. 비용이 없다면 건물에서 버틸 수 없다. 말 그대로 문을 닫아야 한다.

예전 같으면 그 마을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하면 문을 닫았다. 또는 우상숭배가 심각해서 그런 이들의 거센 박해로 인해 교회가 버티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 주변의 교회는 '회원'이 없는 곧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 유지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문을 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명감이 있던 없던 상관하지 않게 되고 결국은 낙인찍힌다. 

 

여전히 생각한다.

어떻게 교회를 세워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때야 할까? 우리 마을에 교회는 그들의 필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늘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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