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준비하며

교회를 준비하며

교회를 준비하며

누구나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우리 하는 말로

 

지갑은 빨리 열고 입(말)은 늦게 열라고 한다.

맥락은 지갑보다 입에 있고 입은 지갑이라는 행동에 뒷받침 되라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입 곧 말에 있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주는 힘이 있다. 믿든 말든.

물론 요즘은 아이들 말로 '그래서' 일뿐인 나이지만 그렇다.

나이가 계급장이던 시절도 지났고

나이가 하늘의 질서라고 했던 시절도 지났다.

 

나이가 들면 곧 어른이라는 시대는 아니다.

그래서 나 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도 인정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물론 언제든지 지갑만 열면 좋겠지만 이 또한 쉬운 건 아니다.

 

각설하고

그래도 보편적으로 모임, 공동체가 형성되면 나이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다보면 나이든 이들이 조심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이가 적은 이들이 나이든 이들을 그래도 대우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러다보면 나이가 있는 이들이 이를 알고 누리다 보면 귄위가 되고 권위가 되면

지시하거나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깥 세계처럼 좀 욕도 먹고, 말 했다가 잘 모른다는 핀잔도 들으면 함부러 말하지 않지만

이런 공동체에서는 그런 경계가 어느 정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천적이 있어야 하지만 ㅋㅋ 그렇다고 미운 털 밖힌 사람처럼 바른 말만하는 이들은 나름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말을 안할 수 없다.

말을 시키기 때문이고 말을 해야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든 이들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경제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의 주장과 사실을 구분해야 하고 자신의 주장을 완성하기 위해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우,좌파로 나뉜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모든 부분에서 그저 경험한 것, 들은 것을 전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듣는 이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며 소속된 공동체의 공동체성도 고민할 정도의 소양을 갖춰야 한다.

 

그런 자세는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만이 유용하다. 물론 그런 도구에 다양한 지식이 함께 필요한 것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만 옳다는 자세 안 된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도 안 된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이 제일 위험하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사실 기독교야 말로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것은인격적 관계때문인데 이를 잘못 다루면나와만 관계한다거나나에게무엇인가를 했다는 식으로 표현될 있기도 하고 그렇게 믿는다면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다보면 마치 연구를 많이하고 내가 하는 것은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건 아닙니다. 자주 생각나는 것을 기록해보고 스스로의 오류를 점검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만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위험함을 미리 경고하려는 장치입니다.


좋은 선배들의 글을 보고 그들 시대에 필요했던 시대의 생각을 읽고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떨까 셈을 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때의 좋음이 오늘의 좋음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보는 일입니다


어쩌면 글들이 읽혀질 사람들은 사람 독특한데라고 하거나새로운 발상인데하거나 한다면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보여진다면 어쩌면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독특함이나 새로운 발상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상인의 말처럼내가 불편하면 고객이 편해진다 것처럼 스스로를 불편해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함께 가는 길에는 이를 이해하고 동역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디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 마찬가지를 가지고 옳다하는 방식을 찾아보고 그렇게 자신이 감당할 있는 일들을 그저 감당하며 살아보려는 뿐입니다.


교회는 공동체! 예배는 공동체?

교회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성이다.

 

요즘은 다양성을 넘어서 각자의 생각, 행동, 표현(행동과 표현을 굳이 나눈다)등

그 자체가 유니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는 꼭 오늘만 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때에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4:24, 마7:2)고 하셨다. 결국 이런 사고방식의 극대화가 오늘이 아닌가 싶다. 

 

이런 와중에 교회는 공동체가 각자의 다양성만을 담을 수는 없다. 초대교회에도 구제하는 문제로 인한 여인들의 갈등에 집사를 세웠다. 일종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물론 공동체성이 조직을 통해서 세워지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세워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각자의 다양성을 통일성이라는 그긋에 어떻게 담을 수 있는가?

이는 곳 예배라는 뼈대를 중심으로 붙여가야 한다. 신앙의 언어로 예배는 은혜의 방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몇 있는데 그중 먼저가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 얻는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를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만 성경에서 보면 모임은 다양한 형식을 갖는다.

 

잘 아는 그림 하나가 최후의 만찬과 같은 장면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가오는 아이의 모습도 그렇다. 오늘 우리 교회는 일관된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규정화되고 의식화된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무시하고 마음 가는대로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일종의 통일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식화에 빠지면 의도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처음에야 그렇지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형식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교회의 화두가 예배의 회복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 왜 말이 길어지고 설명조가 되나 -

 

예배는 공동체성을 세워가는 뼈대이다. 

그런데 형식, 의식화로 인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예배의 영적인 기능만을 추구하다 보니(은혜 받는다) 함께하는 예배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들과 함께 드리지 않는 예배, 가족이 함께 드리지 않는 예배나 그런 교회의 구조적인 상황이 그렇다. 뼈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영양의 상태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함께 강조되는 것이 자세이며 근육을 강화하는 훈련이다.  후자의 둘을 무시하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굽어진다. 

 

함께 한다는 의미에 '공동'은 말 그대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함께 고민을 하기도 하고 은혜를 받기도 하고 할 것이고

각자의 세대는 그 나름대로 해석해서 받아 먹을 것이다.


살 맛나는 삶!

 

 

사람들은 살 맛나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저도 그렇구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물어보면 나름 지금의 삶이 살 맛이 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어려움이 찾아 옵니다.

금전적으로 아이들의 문제로 자신의 건강의 문제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살 맛나는 것은 결국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삶인듯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작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웁니다.

가진 것에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함으로 배우는 거죠.

 

진정으로 살 맛이 난다면

우리의 없음이나 배고픔 또는 부족함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속세를 떠난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지면 욕심이 있고 

버리면 욕심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멀리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살 맛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보기에는 그래보이지 않습니다.

손해보고 사는 삶

고통이 찾아와도 안 그런척하면서 사는 삶처럼 보이기 때문이지만

그런 그들의 삶에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목적입니다.

살 맛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주님을 만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살 맛나는 삶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글쎄요!

그렇게 살아보니 알겠더라구요.

 

홍시 맛이 나니 홍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감독? 플레이어?

어제 '뭉쳐야 찬다'를 봤다.

'어쩌다FC' 라고 스포츠 레전드들이 조기 축구회를 만들고 동호회와 경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안정환 선수가 감독을 맡고

이만기, 허재, 양준혁, 김종오, 김동현, 이윤택(어제 입단했다), 심권호, 이봉주 그리고 방송인 김성주나 정형돈이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거론하는건 말 그래돌 스포츠계에 레전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오합지졸' 첫 경기부터 두 자리 수 골을 내주더니 어제도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어제 방송은 수중전이었는데

사실 경기는 뭐 그랬다. 호흡도 안맞고 서로 말 많고 뛰지 못하는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경기가 분명했다.

 

그런데 안정환의 표정이다.

감독이라고 선수를 한 번에 키울 수도 특별 방법을 제공할 수도 없다.

필드에서 안되는 체력으로 오합지졸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역력혔다.

자신이 뛰고 싶었을 것이다. 

 

어쩔수 없이 지키는 선이 있다. 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기분을 풀고 속 시원하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위치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오합지졸의 선수를 격려하고 슛 찬스에 일어나 상황을 지켜보고

다시 아쉬워 하며 벤치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송 내내 카메라는 안감독의 시선을 비추어준다.

입술이 실룩거리기도 하고 아쉬운 소리가 입밖으로 불쑥 튀어 나온다.

예능인지 실제인지 이미 감독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실 경기는 짜증 그 자체였다. 

방송이니 그렇지 누가 보겠는가? 한 사람 뛰어난 선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직 플레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레전드라 운동에 대한 부심들은 있고 공만 보면 반응처럼 뛰어가는 모습은 딱 운동선수는 분명했지만 말이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는 그리고 목회자나 사역자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자신이야 오랫동안 이 길을 가겠다 생각했고 훈련했으니 그래도 누구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그럼 감독인가?

 

아니면 자신이 플레이어가 되어 팀을 이끌고 오합지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안겨주면 되는가?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특별히 김동현 골키퍼가 장족의 발전을 했다. 수많은 골을 선방했고 자리 잡지 못해 이리저리 뛰는 모습이 

비록 예능이지만 안스럽더라. 그 전 회에서 빛광현에게 특훈을 받았다. 

 

안감독은 그렇게 선수들에게 위로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하더라. 경기가 끝난 후에...

 

한 공동체는 결국 플레이어들이 모인다.

서로의 관심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다. 아무리 비슷한 처지에 모인다 하더라도 한 팀으로, 한 공동체로 성장하기에는 분명 오합지졸이다. 사실 플레이어가 되면 높임을 받는다.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성장하지 못한다. 언제나 그 플레이어로 인해 다른 플레이어들은 묻히고 만다.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래서 지켜보고 안타까워하며 속상해도 자리를 굳굳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때론 '자리지켜'라고 경기장 밖에서 소리칠 수 있다. 답답한 표정을 짓고 볼멘 소리도 할 수있다.

그렇지만 노련한 감독은 자신의 표정을 숨긴다. 그 표정 하나에 그날의 경기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미 플레이어는 안되는 체력으로, 없는 조직력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비록 게임을 질지라도 말이다.

 

안감독은 마지막에 그렇게 말한다.

'지금은 몰라도 결국은 된다' 그게 감독이 보는 시선과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막 꿈을 꾸고 그러는가?

사실 아니다.

 

길에 대한 확신이나 그런 류의 고민이 아니다.

세상 살아오다 보니 딱 보면 보이는 것도 있고  잘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는 꿈은 없다.

그저 말씀과 함께 삶을 나누고 '터'를 잡아 놓을 수만 있다면 

-물론 이 또한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안다 -

생각을 한다.

 

사람이 모이면 모이는 수 만큼이나 문제 투성이가 오늘 교회의 모습이다.

약한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나누고 서로 다독이면서 상처를 치유 받는다.

이 정도면 큰 꿈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치유란 의미는 상처를 덮고 새 살이 돋아 흉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 주변에 마음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치유하는 다양한 치유센터가 많다.

그 중 하나의 교회가 되고 싶진 않다.

 

때론 적당히 돈을 내고 가서 상담을 전문가에게 받고 

그런 가운데 좋아 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교회는

물론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그런 것라면 분명 꿈은 꾼다.


왜 나여야 하는가?

그렇진 않다.

 

내가 사는 곳에도 많은 교회가 있고 이들 교회는 나름 규모를 갖고 있다.

동네 슈퍼가 많으면 결국 서로 힘들게 되고 어려운 상황을 만들게 된다.

 

교회는 안 그렇다.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부익부 빈익빈의 상황은 여전히 작용한다. 

크다는 것은 편리하고 맞다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편리하게 다니려는 교인들의 상태와도 맞닿아 있고

크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다.

어쩌면 난 여기 다녀하는 것에 약간의 자부심도 갖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지역 상황에 나여야 하는 이유는 크게 없다.

그저 지금처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한 생각'을 세워보려 할 뿐이다.

 

그렇게 자란 이들이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의 생각이 그렇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살을 붙여 보는 것이다.

 

혹 이런 생각할 수 있다.

큰 교회에서 요청을 한다면....

다른 사역에서 요청을 한다면...

그럼 이 글은 족쇄가 될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고 많은 라이센스들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데 

왜...마치 로또 복권이 붙으면...

다만 글을 남겨놓다보니 그럴 수도 있고 나중에 이 글을 읽으면서도

웃긴 상황이 되지 않으려는 약간의 사전조치이지만 

솔직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여야 하는 이유는 없다.

쉬운 말로...

교회가 정한 룰 안에서

결국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은 이유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어느 보살핌

'당신은 왜 그렇게 그 사람을 도우려 해'

'그냥 독일에 있는 동생이 생각나서'

 

요즘 아내에게 이런 저런 마음을 쓰는 '스칼렛'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과 그 남편의 대화다.

사람이 좋은데 이유가 있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뭐 하나쯤 없지는 않을 것이다.

 

동네 근처지만 그래도 아랫 마실 내려가듯 좀 내려와야 한다.

'여보 운동삼아 다니라 그래'

'그래도 거리가 있는데'

'그래야 운동도 되고 오가는 이유도 있으니 다른 거 말고 반찬 하나면 이유는 안될까'

그렇게 이야기 한 일이 있다.

 

들고다니기에는 무거워졌다.

어느 날은 예쁜 꽃(아마 난초류 같다)을 선물 받았다.

거기에는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내는 기도한다. 

뭐라고 기도해야 할까? 

 

세심한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런 배려도 서로의 깊은 관계에서 나온다.

살펴보는 일은 시선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선들이 모인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교회를 생각하며

교회는 어때야 할까.
그래도 모였으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다.
보는 눈이 있으니.
그냥 우리끼리 동떨어져 산다면 법이 보장하는 범위에서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될 것이다.

관계하며 살기 때문에 관계를 신경써야 한다.
먼저 성경이 관계하에 살도록 하셨기 때문인데
말로 환원하면 똑바로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잘못하면 욕먹고 사람들은 굳이 모일 이유를 찾지 못한다. 구원이니 하는 심오한 신학적 내용이 있다하더라도 그럴것이다.
성경은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빛이나 소금이나 본질이 그렇다. 전해야하는 당위성을 표현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좋다하는 것이 전달되야하는데 성경만 들여다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얘전같이 특별한 일에 앞장서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가 구조적으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제도화함으로 소위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의 자리가 그만큼 없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는 협조가 필요하다. 사랑의 마음과 기술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해야하는데 이런 일을 안한다.
내가 해야하고 교회 이름이 나야하니 거북하다.

안되면 따라라도 가야하는데 존심이 상해서 그것도 싫어한다. 교회가 하면 갑자기 성스럽고 고귀한 활동이 된다. 이런 사고는 이웃과 경계를 높일 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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