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52절을 읽으신 후에 8장 12절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이 빠진 상태로 읽어도 어색하지 않죠. 대부분의 많은 학자들은 본문이 초기에 기록되기보다는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이곳에 넣어졌다고 하고 이런 근거로 본문에 사용된 단어가 요한복음 전체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차이가 많고 초기에 요한복음을 인용할 때 인용되지 않는 면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성경의 읽고 빼고하는 학자들의 의견이나 이런 과정이 성경을 이해하고 읽는데 문제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 과정에서 성경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체하려는 또는 어떤 과거의 작품과 같은 이해를 갖고 있는 부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본문의 어색함 속에서도 이 사건을 넣었을까요? 2절은 계속해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이런 예수에 대해 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한다고 6절에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 잡힌 여인입니다. 이야기가 그렇듯 늘 핵심을 잃어버리면 이야기를 통한 교훈점에만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처럼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한 시인의 절규가 아니라 나라를 잃은 고통 속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이 읽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앞서 7장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다면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5절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이고 앞서 7장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설명했던 기억이 본 내용에 고스라니 담겼기 때문에 말 그대로 예수를 시험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 당신이 율법을 들먹였으니 어디 실제로도 그럴수 있는지 한 번 봅시다'라고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살펴야할 율법은 ‘간음'에 대한 율법 규정입니다. 신명기 22:22–24 “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섭리는 창세기 2:24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는 창조 섭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이 자신들의 벌거벗음 뒤에 오히려 성적인 쾌락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었습니다. 창세기 13:13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그들은 요즘에나 문제시 되는 동성애 범죄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 결과는 심판이었고 이를 예레미야 23:14 “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늘 반면교사 삼았지만 결국 예루살렘도 이러한 가증한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신명기의 법은 매우 강력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으로 가정있는 ‘유부녀'를 보다 강조하고 있은데 중요한 점은 ‘둘 다' 죽인다는 것이죠. 가정의 중심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에게 더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만큼의 위치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가정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잡힌 여자를 끌고’ 왔다고 했으니까 여기에는 남자가 빠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아무래도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이고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면 ‘음행중인' 다시 말해서 현장에서 잡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약간의 상상을 더하면 이미 그 여인의 잦은 음행을 알고 있어 현장에서 잡을 수 있는 경우, 아니면 극단적으로는 의도적으로 음행 현장을 만들어 여인을 끌여 들였다고도 해석할 여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요즘 말로 기획된 함정 수사, 또는 무엇인가 주범 또는 공범인 남성은 빠진 채 사회적 가장 약자인 자기 변호가 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나 약자에 대한 폭앞도 분명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잡혔다는 말은 결코 예수님 조차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맞닥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앞서 7장에서 이들과의 다양한 논쟁에서 말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에서도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핵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긴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결국 이 말을 듣거나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시겠다는 뜻을 거스려 스스로가 아들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첫 번재 포인트는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죄를 지적하는 사람은 죄의 근거가 되는 법 조문으로만 해석합니다. 그 법 조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빨간 신호등에 통과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법을 어긴 사람은 그 이유가 어떠하든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은 법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살폈던 신명기의 법은 하나님께서 왜 재정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하는 말로 ‘걸리기만 해봐 가만 안두겠어'하며 덫을 파듯 걸려 넘어기기를 바라면서 만든 법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백성다움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삶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라고 만든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가 맞다고 말하면서도 실상 그 법의 위험성 그리고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 속에서 에레미야 선지자가 죄악의 결과로 망하게 된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약속을 만들고 지켜보자는 요구는 이를 통해 자식을 위하는 마음을 담고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누리는 혜택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지켜야할 자녀로써의 도리를 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율법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그들 입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도전이었고, 신성모독이었지만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도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율법의 완전함은 훼손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율법과 같은 그리고 각종 규칙들은 언제나 안타깝게도 가장 약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는 더 치명적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은 뉴스를 통해 경제적으로 큰 문제를,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 비해 오히려 약자들이 저지를 작은 죄라도 물로 물어 뜯는 언론들을 자주 접하게 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최근에 배우의 마약 혐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비록 인기인이라고는 하나 그들에게 요구하는 어떤 사회적인 규범은 그 어떤 그룹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음주 운전 한 번이면 연예계에서 퇴출되는 죄목이 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보를 하는 인사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가 넘는 경찰 조사와 경찰이 언론에 흘리듯 뿌린 개인의 사생활은 무차별하게 폭로되어 한 개인으로 살아 갈 수 없도록 만들고도 그들은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간음한 여인이라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고 율법에 의해서도 마땅히 사람들 모두가 돌로 쳐 누구의 돌에 의해 죽은지 모를 정도로 모두가 죽여도 된다는 사실은 본문을 읽으면서도 ‘마땅히 받을 벌이네'라든지 ‘그래도 용서를 받을 수는 없지'라든지, ‘간음한 건 사실이잖아'라든지 쉽게 본문 이해를 방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각은 간음한 여인이 아닙니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대화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의 질문에 ‘주여 없나이다'라고 답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더 주목되도록 요한복음의 기록자는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려는 계략으로 한 여인의 뒤를 쫓고 그 여인을 이용해 예수를 잡으려는 올가미를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고상한 말 뒤에 숨은 그들의 행동은 여인이 완전한 죄를 지을 때까기 기다렸다가 현장에서 잡는 치밀함으로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서기관, 바리새인들 편에서 아니 적어도 그래 이건은 어떻게 되는지 우리도 한 번 지켜보자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글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혹시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계획적이면서도 치밀한 자들에게 감시당하고 있고 현장범으로 잡힐 만한 자들이라면 어떻게 될가요?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소를 당하고 있다면 과연 피할 길이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12:10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에서는 마귀가 밤낮으로 참소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밤낮으로 참소하는 죄가 끊임없이 쌓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변호자가 되시듯 그녀를 보호하십니다. 그들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참소는 마귀의 몫이지만 정죄는 결코 그들의 몫이 아닙니다. 죄 있는 자가 어떻게 정죄를 합니까? 비록 이 땅에서는 그런 자들이 검사여도 판사여도 판결을 받지만 우리 영혼의 판결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9절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던 상황에 예수께서는 고발하던 자들이 없음과 그들의 사라짐은 정죄하는 일도 멈췄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남은 예수님 조차도 ‘여자여'라고 높은 존칭으로 부르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다음에 이어지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시는 말씀과 같이 기록됨으로 용서와 앞으로 여인의 행동이 함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늘 공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범죄하지 않으려 살아내는 삶은 여인에게 남겨진 또 다른 시작입니다. 비록 그들의 고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여인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노출됨으로 인해 유대 공동체에서는 결코 함께 살기는 어려웠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용서와 주님의 말씀이 죽이려 했던 이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잠시라도 돌이켰지만 주님의 그 말씀으로 여인이 평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저나 여러분이 기대하고 있는지 물어보고자 합니다. 때론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위기의 경우만 넘기면 되는 임시용은 아닌지 그리고 언제든 꺼내어 주님 앞에서 우리의 보호용 말씀으로 쓰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간음을 하지 않는다는 현실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흔한 말로 법만 지켜도 된다곤 했지만 그렇게 지키며 사는 이들이 결국 더 주님의 오심을 반대하는 자들이 된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면에 기대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2024.01.23 17:25
20240114 주일예배 (요한복음 7:53-8:11) 죄를 범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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