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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다룬 긴 본문의 내용을 아주 짧게 표현 한다면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 풀어보면 ‘생명의 떡은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먹이신 만나를 염두해 두시고 마침 유월절의 시간에 광야와 같은 공간에서 5천명이 굶주린 상황에서  베풀어 주신 먹고 마심의 결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에게는 특별히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심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견고하게 믿도록 하셨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생각에 기적 +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말에 ‘경험이 깡패'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경험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면 이제 예수께서 얼마지나지 않아 십자가 죽으심으로 결과적으로는 제자들이 남겨질 것이고 그 이후의 세대는 직접 베푸신 기적을 경험할 수 없는데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될까요?

‌11월 22일에 충적격인 소식이 있었는데 새벽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성도 3분이 파란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건너시다가 신호를 위반한 차량의 돌진에 그대로 치어 3분 모두 사망 뉴스였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 이건 정말 너무하신거 아닌가요. 그래도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나오는 길인데’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고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불연듯 찾아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고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이런 뉴스를 볼 때 이해와 달리 그런 마음 아픔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 절실한 기적은 어쩌면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아닌지 또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너무나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것도 우리 현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59절에 ‘가르치신다'라고 하면서 ‘가르침'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반응을 살피서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짧은 영상을 하나 보겠습니다. ‌물론 저는 지난 시간에 믿음을 열정보다 이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결과가 열정적으로 찬양을 하는 것보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의심하고 두드려서 믿는다는 의도가 아니라/ 경험을 하니 이건 믿어야 한다는 식의 열정과 가르침에 대한 받아들임이 우리에게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다만 영상에서 부모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아이가 갖는 부모의 완전한 의존이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형태에서 ‘행동'이라는 것을 반드시 수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반응을 보인 이들은 60절에 제자 중 여럿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제자는 예수께서 부르신 자들을 의미하는지 또는 무리 가운데서 특정되어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이들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66절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났다는 표현을 볼 때 후자에 더 가깝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들은 가르침에 대해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려우면 포기합니다. 영어도 어렵기 때문에, 수학도 어렵기 때문이고 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들어 잘 가르치는 선생들이 미디어에서 나와서 보여 주는 가르침의 특징은 바로 ‘이해'라는 것입니다. 이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성'을 기반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했던 다른 영역 다시 말해서 획일화된 교육 방식으로 보지 못했던 ‘이해'의 문을 열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구약의 사건을 오병이어 사건과 ‘하나님의 뜻’을  제자가 되겠다고 따르는 이들에게 ‘이해'를 통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안 답만을 외우고 공식만을 외워서 대입하는 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단순해 보여도 그 이면에는 한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동의'가 일어날 때 비로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61절에 말씀하시죠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다시 말해 ‘내 말이 오히려 너희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구나' 이것입니다. 

‌  우리는 본성적으로 설명 듣는 것을 싫어 합니다. 잠언 15:10 “10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잠언 13:1 “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오늘 시대가 그렇습니다. 예전 부모 세대는 학교 선생님의 말 한마디면 정말 끝이었습니다. 반면 지금은 교권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시대는 비단 지금의 사건만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18 “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당시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는  ‘자기 중심적 사고'가 지배하면 드러나는 것이 ‘자랑'입니다. 지금은 그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하면 싸움이죠 그러니 서로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공식을 외우고 대입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사고의 틀인 ‘자기 중심적'을 ‘주님 방식의 사고'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정이 나중에 등장하는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13:3-4) ‌아무튼 기적은 방향을 가르치는 표적입니다. 예를들어 도로를 달리다 보면 표지판에 김포/ 서울로 나눠진다면 어디로 가십니까? 당연히 가야할 장소가 정해진 곳으로 갈 것입니다. 집으로 가고자 한다면 김포 방향으로 시내를 나가려고 한다면 서울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라는 목적지를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가야하는 길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62절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입니다. 예수는 지금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제자라 말하는 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전에 있던 곳'이 있으신 분 즉 하나님의 우편 보좌입니다.  그렇게 바라고 원하는 ‘메시아,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결국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우리를 통치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가 그 방향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살려만 주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구약의 만나 사건은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가 채워지는 만족이듯, 애굽에서 떠난 삶이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매일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듯 우리의 소망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생명'이 갖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표현에 ‘싱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도 손을 대보면 팔딱 거리는 생선을 싱싱하다라고 말하고, 야채든 채소이든 무른 곳이 없이 단단한 것을 보고 싱싱하다라고 말하듯 살아 있으니 생명이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이 있다라고 하는 상태는 이처럼 먹고 마심에 왕성하여 배부름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즉 앞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  앞서 보았던 영상처럼 ‘반응한다' 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생명은 분명하게 있으나 먹고 마심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본문의 의도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으로는 살아 있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4장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삶 자체가 반응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4절에 보니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반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으면 우리 생각에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두 가지 충격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하나는 64절 계속해서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라고 하는 말씀과 71절에 자기를 파는 자가 바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라고 미리 밝힌다는 것입니다. 

‌  믿지 않는 것의 반응은 결국은 예수를 배반하는 것 즉 예수를 파는 반응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편으로 애써 예수를 믿고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결국은 예수님과 반대로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러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표지판을 잘 보고 왔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한 곳으로 가는 느낌을 받을 때 비로소 표지판을 잘 못보는 착각을 했든 아니면 목적지를 잘못 알았든 알게 됩니다. 또한 지하철을 탈 때, 버스를 기다릴 때 잘못된 곳으로 향하면 바로 알기 보다는 우리 사고의 구조는 한 두 정거장 때론 아무 생각없이 한 참을 지나고서야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 것입니다. 

‌  단순히 ‘길치, 방향 감각이 없어서'라고 말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게 반응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부르시고 있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자비와 인내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기다리심에는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65절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입니까? 예수를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든 기회가 되면 나는 믿을 수 있다. 내게 계속해서 그런 기적을 보여준다면 나는 충분을 믿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니다. 믿음에 대한 반응이 비록 너희가 결정하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주권의 드러내심'이다. 라는 것이죠. 

‌ 당연히 고난 받던 애굽에서 바로에게 재앙으로 그들을 출애굽한 사건, 그리고 만나와 매추라기뿐만 아니라 반석에서 물을 주셔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인 것처럼 지금 우리의 삶이 비록 내가 돈을 벌고 쓰고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처럼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믿음 없음의 반응 즉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는 것이죠.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떠나가는 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빌립처럼 예수 곁에 있는 자들, 어려운 말씀이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열 두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앞서 불렀던 제자들과 함께 이미 열 두 제자가 구성 되었고 그들에게 믿음의 길로 방향을 정할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67절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이 ‘너희는 아니지', ‘너희는 남아라' 등 꽤 다양한 질문이 있을 것 같은데도 ‘너희도'입니다. 충분히 ‘너희도' 그들처럼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처럼 그렇게 반응할 것이냐는 결국 ‘결정'을 묻는 것입니다. 

  ‌여기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게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동안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믿음의 반응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등장하고, 이어서 가룟 유다도 같이 등장하지만 서로의 길은 달랐습니다(71).  베드로는 말과 행동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말과 행동이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가 ‘마귀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고 계십니다. 

  ‌마귀의 가장 큰 특징이 ‘속이는 자'입니다. 마귀는 가룟 유다 스스로를 속입니다. 유다 스스로는 ‘나는 예수께 믿음의 반응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앞으로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가 속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 즉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읽고 이성의 합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는 이유는 바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려고 여전히 우리 곁 또는 마음 한구석을 자리 잡은 부패성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은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부패성 때문이고 그래서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태도를 배우라는 것이죠. 이것이 요한 사도가 여전히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삶의 변혁을 이끌고 싶다면 먼저 베드로처럼 주님이 생명의 떡 즉 영생의 말씀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69절에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아는 것은 앞서 예수님의 어려운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들었고 6장에서 ‘하늘의 양식 즉 생명'이심을 들었던 베드로는 ‘주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사실을 깨닫자 ‘믿음' 즉 예수를 떠나가지 않고 예수께로 정확하게 방향을 정한다는 마음의 핸들을 틀은 것입니다. 

‌  저와 여러분에겐 이미 방향을 정하고 핸들을 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매 순간 표지판을 만나는 것처럼 ‘과연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가?’라는 처음 앞에 서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질 때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고속도로의 이정표는 먼저는 최종적인 목적지를 표시하고 들어서면 가는 도중에는 중간 중간의 도시들의 표지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처음 이정표를 보고 길에 들어 섰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또는 직장과 결혼 등 삶의 이정표를 많이 만날 것이고 만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있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결국은 도착할 것입니다. 잠시 곁들로 들어 돌아 갈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처음의 이정표를 다시 만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  히브리서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앞서 갖던 모든 이들이 그렇게 갖고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바라는 바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요한 사도의 표현을 빌어 말씀드리면 저와 여러분은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고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반응을 하는 자들이다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한 주간의 위로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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