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풍무동교회를 꿈꾸며
  •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조회 수 3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2절 본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짧은 6절로 소개된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 놀라운 기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짧은 6절에 해당되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내용은 마태와 마가 역시 소개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제촉해 먼저 바다를 건너가게 하신 후 산으로 기도하러 갔고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 바람이 심하게 불고 이로인한  파도로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 새벽 3-6시 사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해 두려워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오판은 생략하고 ‘두려워했다’라고만 말하고 이어서 ‘나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이 한 줄, 한 단어라도 충분한 가치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오천명이 먹는 기적을 행하시고 예수께서는 산으로, 제자들은 왜  바다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22절부터 예수님의 해석을 이어가는   부분에 짧은 내용은 뜬끔없는 느낌을 갖기도 합니다.

  ‌무리는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이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지난주 광야에서의 불평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고 그런 과정에서 진정한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세워지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22절부터 자신이야 말로 하늘에서 내려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6절은 굳이 흐름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여러분 요한 사도는 글을 통해 꽤 시간 시간 후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 비교를 하보면 우리가 지금 6.25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어떨까요. 요한 사도는 글을 통해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십년이 지난 이야기를 현재로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은  무리 대부분아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출애굽 사건과 시간적으로 마침 유월절 명절을  앞둔 상황과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가 마치 광야에 모여들어 먹을 것이 없는 때를 잘 맞추듯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시의 독자들은 5천명이 먹는 사건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요한 사도가 말하는 의도 즉,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인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능력의 예수님은 이미 1장에서 창조주와 함께 하신 말씀이신 분이라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이것은 6장 초반 빌립이 놓치고 있는 것이었죠. 빌립이 갖는 인간의 한계는 기적의 현장에서도,  요한의 글을 듣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지 오래이지만 그럼에도 예수께서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알고 또한 안다면 그러한 앎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그 길로 가고 있는가를 여전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안그러면 왕을 삼으려던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찾거나, 빌립처럼 예수님의 곁에서 여전히 각자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죠.

‌  예를 들어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한 관심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어떤 교회를 원하고 계신가? 저에게는 당사자로 질문한다면 여러분에게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질문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통해 제자와 무리가 구별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이런 기적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무리가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확실하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걷는 장면을 보셨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 중에서 예수를 믿지 않았을까요? 라고 합리적으로 답을 한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리의 편에서 소위 말해 대중의 편에서 보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빌립에게 물어보신 의도를 유지한다면 예수께서 관심을 갖는 대상은 무리보다는 제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5천명이 먹는 사건의 놀라움은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바다 위를 걷는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저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 즉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를 확증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즘 사고로 무리에게 보여주셔서 더 많은 사람에게 구원 소식을 전하고 알려준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영역에서는 결국 믿음은 선택의 문제와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나 숫자에 우리는 약한 면이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이나 적은 수에 사람들은 의외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대의 기류입니다.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에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할 때 빌립의 마음에 있는 합리적인 사고, 5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마셨다는 놀라운 기적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당연히 5천명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을 주심으로 ‘생명'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지금은 아니라도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부르신 자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요한 사도의 의도입니다. ‌제자의 길을 고난의 길로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결론은 요한복음 6:21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과 같이 ‘기뻐서 가려던 땅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글처럼 유령으로 알고 놀라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깨닫는 순간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 살폈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 ‘기뻐하는 것'  이 기쁨이 저자 요한 사도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지난주 출애굽기의 불평이 시작되는 사건이 길게 이어지고  19장에 시내산에 도착해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율법을 받습니다. 잘 알고 있는 십계명입니다. 20장부터 모세는 계명을 백성들에게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24장에 백성을 대표한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때의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24:11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정말 멋진 광경이 아닙니까? ‌그렇게 건너편에 계신 예수를 무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이렇게 자신을 찾는 이유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입으로는 ‘그 선지자’까지 도달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선지자는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아닌 정치적인 왕으로 삼고 싶었던 것입니다. 27절에 썩을 양식이라는 말은 지난주 만나가 어떻게 섞었습니까? 그 자체로 그랬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결과입니까? 그래서 ‘썩을 양식'입니다. 당연히 썩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신 안식일 전 날에 거두는 만나는 갑절로 거두어도 썩지 않았습니다. 

‌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광야의 생활입니다. 지난주 저는 이런 예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과자 한 봉지를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고쳐주시고 배고픔을 해결해주시는 예수을 보자 눈이 열렸고 ‘선지자'라고 말은 했지만 그들 마음 속에는 ‘이분이야 말로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왕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추대해서 그분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2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무리는 믿으려면 믿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우리도 상대와 어떤 거래를 할때 믿어달라고 하면 ‘뭘 보고 믿느냐' 믿을 만한 것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  그래서 나이를 속이면 민증을 까면되고 졸업을 했다면 졸업장을 제시하면 되는 것이죠. 겉으로 예의를 갖추었지만 불과 어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그래서 만나와 자신을 직접 연결합니다. 은유법이죠. ‘내가 떡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린 떡인데 나는 참떡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6:4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시편 78:24 “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시편 105:40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느헤미야 9:15 “15 그들의 굶주림 때문에 하늘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들의 목마름 때문에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겠다고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말씀하셨사오나”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바'입니다. 성경이 자신을 예언하고 가리키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기록된 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먹고 마신 것으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을 참떡이라고 하셨다면 이 떡의 의미는 ‘생명'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33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죠. 더 나아가 35절 ‘나는 생명이 떡이다' 그러니 떡을 향해 오는 자가 어떻게 굶주리겠습니까? 떡을 먹는 자가 배부르고 생명을 연장받듯,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표적을 원하는 그들에게 예수를 본다는 것이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장에서 먼저 언급된 이들이 예수를  예언된 말씀과 직접 본 것이 그들에게 믿음으로 작용되었듯 무리들에게 36절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나는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떡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떡과 의미가 분리되었던 만나와 달리 하나이신 ‘참떡’입니다. 38절에 ‘내 뜻이 아닌 나를 보내신이의 뜻'을 그대로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면서 그 뜻이 40절에 ‘아들을 보고 믿는 자' 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오신 예수를 보고 믿는 자는 떡이 갖는 육신의 생명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돌려 말하는 듯한 예수의 말씀에 답답했고 계속해 질문을 하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는 다면 영생을 얻게 된다’라고  대놓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영생은  더 나아가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린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니 종말의 때가 있다는 의미와 죽음이 연결되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메시지는 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  직접적으로 듣는 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너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피하지 않습니까?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고 막상 듣고 나면 뒷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죠. 정말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이신 예수를  무리는 ‘무슨 소리하는거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니 조사해보니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인것도 모르는 줄 아나, 말이 되야 믿지, 정말 어이가 없구만' 하는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어떨까요? 어제 밤에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적어도 무리들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이죠. 그 의미가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게서 이끌지 아니하시면'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이끌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54:13 “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6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고 이는 즉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런 표현과 말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믿는 다는 것은 예수를 아는 것, 예수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훈을 들을 줄 아는 것, 하나님의 교훈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시고 그렇게 이끌고 있는 자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날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지식이 아니라 경험한다는 의미라는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 속에서 혈관으로 피가 지나다니며 심장에서 판막이 열고 닫히며 매순간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듯 그렇게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48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는 말씀까지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 문제가 아니라 물 흐르듯 믿음으로 사고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당연함'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49절부터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그랬다 그래서 그들이 죽었다' 육신만 살린 떡이 아니라 떡과 함께 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결과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뜻과 함께 있는 그 자체다. 나를 먹어라는 것은 나를 보고 경험하라는 것이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을 볼 것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것이고, 내가 한 말이 어떻게 일어날 것을 또한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이 어려울 것입니다. 60절에 ‘어렵도다' 정말 그렇습니다. 좀 쉬운 예가 있다면 병원에서 어려운 의학적인 진단의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죠. 왜냐하면 의학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냥 저만 믿고 약 드시면 됩니다. 또는 수술 받으시면 됩니다 하는게 아니라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 주든지 여차저차한 설명합니까? 그 자체가 병을 치유하는 단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5천명을 먹이는 사건을 경험하고,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는 것이 이해와 지식의 기반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믿는 일의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의사의 말 한마디, 억양과 표정을 읽지 않습니까? 우리는 요한 사도의 텍스트만 읽고 있지만 성령께서 지금 예수님의 억양, 분위기를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  59절에 그래서 지금 ‘가르치실 때' 앞서 말씀드린 이사야의 말처럼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과 같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려운 말씀을 받습니다. 쉽게 설명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사실 예수께서 지금 그대로 전달하는 내용을 왜 바꾸어 전달해야 합니까? 오히려 저와 여러분은 계속해서 읽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66절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1. 14
    Aug 2023
    14:31

    공지> 본 설교는 초안 작성 후 적당한 내용이 정리된 상황에서 올리는 글입니다.

    본 설교는 초안 작성 후 적당한 내용이 정리될 즘에 올리는 글임을 밝혀 둡니다. 완성도는 떨어지고 실제 설교와는 상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제로 주일 설교가 진행되고 이런 내용이 설교의 방향이라는 내용을 전달하고자 올리는 목적입니다. 설교 기본 소...
    read more
  2. 23
    Jan 2024
    17:25

    20240114 주일예배 (요한복음 7:53-8:11) 죄를 범하지 않는 삶

    먼저 52절을 읽으신 후에 8장 12절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이 빠진 상태로 읽어도 어색하지 않죠. 대부분의 많은 학자들은 본문이 초기에 기록되기보다는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이곳에 넣어졌다고 하고 이런 근거로 본문에 사용된 단어...
    Read More
  3. 23
    Jan 2024
    17:14

    20240107 주일예배 (요한복음 7:37-52)

    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5-36절까지는 7장을 계속해서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주제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루면서 45절부터 52절까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7장...
    Read More
  4. 02
    Jan 2024
    09:38

    20240101 송구영신예배 (데살로니가 1:3) 24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내용은 없음)

    24년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3절에 바울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3가지를 차례로 나열한다. 이러한 3 가지는 먼저 '기억함'이라는 즉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편지를 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떠...
    Read More
  5. 02
    Jan 2024
    09:11

    20231231 주일설교(요한복음 7:25-36) 표면적인 크리스천이 되지 마십시오

    본문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 또는 상황이라고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본문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오늘 설교는 무슨 교훈을 주는 말씀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를 위해서 먼저 본문의 분위기를 요한 사도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설명 드...
    Read More
  6. 25
    Dec 2023
    09:23

    20231224 성탄 주일설교(레위기 11:44-45) 거룩

    레위기 11:44–45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
    Read More
  7. 17
    Dec 2023
    14:19

    20231217 주일설교(요한복음 7:14-24) 사건의 지평선이신 예수님!

    예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기적이 중심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경험이야 말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렇지만 자세하게 경험이라는 부분을 들여다 보면 체험과는 구별됩니다. ‌예를 들...
    Read More
  8. 17
    Dec 2023
    14:01

    20231210 주일설교(요한복음 7:1-13) 초막절 그리고 믿지 않는 것

    본문의 이야기 구성을 먼저 살펴보면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하시는데 유대로 가지 않는 이유가 ‘유대인들이 죽이려'한다고 시작합니다. 이런 흐름은 예수께서 ‘죽음을 피하시려는 의도'로 읽혀집니다. 그렇게 ...
    Read More
  9. 17
    Dec 2023
    13:57

    20231203 주일설교(요한복음 6:60-71) 생명의 떡 그리고 영생의 말씀

    지난 주 다룬 긴 본문의 내용을 아주 짧게 표현 한다면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 풀어보면 ‘생명의 떡은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먹이신 만나를 염두해 두시고 마침 유월절의 시간에...
    Read More
  10. 17
    Dec 2023
    13:54

    20231125 주일설교(요한복음 6:16-59) 제자와 무리

    22절 본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짧은 6절로 소개된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 놀라운 기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짧은 6절에 해당되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내용은 마태와 마가 역시 소개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제...
    Read More
  11. 17
    Dec 2023
    14:06

    20231118 주일설교(출애굽기 16:1-10)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설명을 앞서 배경을 말씀드리면 출애굽한 백성들은 14장에서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15장에서 출애굽의 큰 구원을 노래합니다. 출애굽기 15:1 “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
    Read More
  12. 17
    Dec 2023
    13:50

    20231111 주일설교(요한복음 6:1-15) 예수와 그 선지자

    오늘 본문의 중요한 키워드은 ‘증언’입니다. 재판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증언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본 것에 대한 증언인데 예를 들어, 검사나 변호사는 이렇게 물어 봅니다. 실제로 범행 장면을 봤느냐, 아니면 흉기를 들고 있는 장면을 ...
    Read More
  13. 17
    Dec 2023
    13:39

    20231104 주일설교(요한복음 5:31-47)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

    오늘 본문의 중요한 키워드은 ‘증언’입니다. 재판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증언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본 것에 대한 증언인데 예를 들어, 검사나 변호사는 이렇게 물어 봅니다. 실제로 범행 장면을 봤느냐, 아니면 흉기를 들고 있는 장면을 ...
    Read More
  14. 17
    Dec 2023
    13:33

    20231029 주일설교(요한복음 5:19-29)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지지난주 오래된 병을 고침받은 이를 통해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님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함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결과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의미로 충분히 해석되도록 행동하신 것입니다. ‌19절에 ‘그...
    Read More
  15. 17
    Dec 2023
    13:09

    20231022 주일설교(데살로니가전서 1:1-10) 주님을 믿는 다는 건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알고 믿음을 갖는 것 즉 복음은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인가를 아는 것이고 이러한 앎을 통해서 올바른 믿음을 갖은 충분히 이해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
    Read More
  16. 17
    Dec 2023
    12:58

    20231015 주일설교(요한복음 5:1-18) 오래된 병자와 하나님의 아들

    많은 설교자들이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크게 잘못된 것 중 하나가 기적 그 자체와 당사자의 믿음을 부각하는 해석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이를 둔 왕의 신하 그리고 오늘 본문의 38년된 병자 사건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현실에 필요한 내용을 ...
    Read More
  17. 17
    Dec 2023
    12:47

    20231008 주일설교(요한복음 4:43-54)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Read More
  18. 17
    Dec 2023
    12:45

    20231001 주일설교(창 32:1-13)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 (추석 가족예배)

    Read More
  19. 17
    Dec 2023
    12:39

    20230924 주일설교(요한복음 4:16-42)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

    Read More
  20. 17
    Sep 2023
    21:54

    20230917 주일설교(요한복음 4:1-15)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1)

    Read More
  21. 10
    Sep 2023
    15:19

    20230910 주일설교(디모데후서 3:1-15) 너희는 이것을 알라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