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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중요한 키워드은 ‘증언’입니다. 재판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증언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본 것에 대한 증언인데 예를 들어, 검사나 변호사는 이렇게 물어 봅니다. 실제로 범행 장면을 봤느냐, 아니면 흉기를 들고 있는 장면을 봤느냐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범행한 근처에서 만약 흉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하겠지만 용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현장에 도착했고 바닥의 흉기를 들었을 뿐이고 그때 나를 본 것이다’며 범행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증인이 무엇을 본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5장은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면서 시작되고  예수님는 사건의 당사자이면서 자신을 증언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31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 나 자신의 일을 내 입으로 증언한다면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과 이어 보면 ‘그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아버지의 하시는 일과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올바른’ 일 이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하신 일 즉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아버지의 일이고, 내 뜻이 아닌 ‘그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의로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  뿐만 아니라 심판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 이기 때문이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셨고 심판의 권세까지 주셨다고 말한 다음에 아들은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나를 보내신이의 뜻대로’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가 아닌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이기 때문에 내가 행하는 것 즉 ‘내 심판’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31절 ‘나를 위해 증언하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서 말한 모든 것이 들리는 사람에게는 ‘결국 자기를 위한 말이구만’하는데 예수께서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앞서 세례 요한의 증언도 살펴보았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요한의 증언도 너희에게는 효력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나는  ‘사람에게 증언을 취하지 아니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요한의 증언 효과에 있서서는 ‘너희로 구원을 받게’하는 것, 증언이 필요 없음에도 사람의 증언이 나에게가 아니라 ‘너희로’를 대상으로 할 때 증언의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한의 증언도 등불이며, 그 등불로도 너희가 한때 즐거이 받는다는 것이죠. 요한이 비춘 빛은 등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비추신 빛은  등불과 비교할 수 없는 태양 빛과 같습니다. 36절 ‘더 큰 증거’가 아버지의 뜻이 나타는 역사, 예수께서 하시는 그 일이 우리를(나를) 위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스포츠를 주제로 다룬 영화를 보면 감독으로 부임한 사람을 선수들이 인정하지 않는 장면이 연출될 때 감독은 마치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줌으로써 선수들이 ‘감독’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죠.  예수께서 하신 일은 ‘사람에게 나타난 일’이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누가 예수께서 하신 일처럼 물을 포두주로, 사람을 아시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고, 병자를 말로서 고치실 수 있을까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빛이신 예수계서 ‘더 큰일’ 생명으로 옮기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어떤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증인은 어쩌면 자기가 자기를 증언하는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37절의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한 증언’이라면서 ‘그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앞서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내가 하는 일 봤지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동등한 거야’라고 말하는 예수님은 ‘내가 한 일은 내 맘대로 한 게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한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버자와 함께 했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해서 다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런거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증언은 맞지 않죠 그래서 ‘아버지가 친히’ 나서는 장면은 모든 것을 정리합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등장하는 장면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장면을 암시하는데 요한복음에 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Matthew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언이야 말로 가장 권위 있는 선언으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나중에 요한1서 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2023년 오늘에도 그대로 적용되나요? 이렇게 변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 정말 있었나요? 있더라도 그때의 사건으로 끝난게 아니가요? ? 이러한 내용이 37절에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엿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맞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현.능.직) 성경을 연구하거니와(현능직, 조사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감정을 동원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도 흘리고 가슴을 치며 때론 찬송이나 복음성가에 마음을 쏟듯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라는 텍스트는 생각보다 냉정합니다.  읽고 연구하는 과정 찾고 조사하고 생각해서 이해하는 냉철한 이성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 너머의 세계를 볼 때 비로소 나 자신의 전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mbti의 i 보다 t가 맞습니다.

‌  성경은 이미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기록하고 있고,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있었고 이러한 소망을 몸소 지키는 것이 ‘율법’과 ‘안식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부모가 집을 비우면서 아이에게 할머니 말씀 잘 듣고, 형, 누나 말 잘 듣고 있어라하면 아이의 마음에는 ‘말을 잘 듣는 것’으로 인해 부모가 빨리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린아이 믿음입니다.  부모가 오는 것은 부모가 나간 목적이 마무리되어야 오는 것이죠. 

‌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은 부모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부모의 부재중에도 기준이 되어 부모가 있는 것에 준하여 살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죠 . 물론 부모의 부탁을 잘 지키려는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돌아오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서둘러 마치는 것,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집으로 오는 조건입니다. 물론 소식을 통해 아이가 부모의 말을 잘 준행하고 있다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잘하고 있구나, 서둘러 일을 마치고 가능하다면 예상보다 더 빨리 가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오는 시기가 늦어지고 아이가 좀 성장하자 부모를 기다리는 마음은 지킨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얼굴을 잊은 아이는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자기가 만든 생각 속에 부모만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죠. 바로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들은 이렇게 ‘율법과 안식일’을 하나님 이상으로 더 나아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으면서도 실제 완전한 계시자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를 부정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방향을 상실했다’라고 말합니다. 

‌율법과 안식일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침반입니다. 그들이 연구하는 성경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세례 요한처럼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라고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서 아이에게 문 열어달라는 부모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한 아이는 한편으로는 부모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문 앞에서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실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생각 안에 갇힌 것입니다. 

‌  예수께서 이들을 향해 성경을 연구하며 메시아를 기다렸구나 40절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하지(원하다,바라다, 미.능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약속하신 분으로 그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기적을 통해 보여주셨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 시킴으로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이며 왜 안식일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직접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알려 주셨음에도 그들은 ‘원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굳은 마음은 사랑이 자라날 틈이 없이 딱딱한 상태 즉 ‘율법과 안식일’을 지킴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기 믿음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38년동안 병에 빠져 나를 도와줄 이가 없어 고침받지 못한다고 말한 병자보다 더 깊은 병에 빠진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42절 이를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완.능)’라고 말합니다. 

‌  맞습니다. 우리는 가까이에서 보며, 만지며, 이야기하며 사랑의 교제가 일어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동산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교제가 일어나야 하지만 타락은 죄와의 교제로 인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 사귀고 교감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서 고통받지 않고 함께 모여 교제하며 식사하며 서로를 위해 같이 눈물 흘리며 깊은 공감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처럼 딱딱한 말씀이 여러분 가슴에 물방울이 맺히려면 사랑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여러분 사랑을 느끼겠습니까? 먼저는 우리를 사랑하사 이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성경의 말씀을 연인 드라마의 길채를 바라보는 남주의 마음을 길채가 깨달아가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4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 즉 하나님의 아들로 오니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한다는 것은 즉 사람의 높음 앞에 무릎을 조아리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지난주 29일에 1주년을 맞이한 이태원 참사에 대통령은 모 교회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권력자의 사적인 요구를 공적으로 둔갑한 것을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영광을 높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딱,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높이는 것, 사람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이 사람으로 취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심판할 법이 스스로가 지킨다고 하는 ‘율법’이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부인 그리고 정권의 고위 인사들이 법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세상이라고 설치지만 결국 그들이 휘두르는 법의 날카로운 날에 베일 날이 분명 올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통해서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야 말로 심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의롭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우리는 율법과 안식일을 지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야 말로 의로운 자들이다’  이런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 ‘위선자’입니다.  스스로는 법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방향을 바꾸려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나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그중에 성경대로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기적을 행한다면서 스스로를 메시아 또는 대리자로 불리는 이들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고 영향력도 큽니다.  당연히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고 이렇게 정립된 해석을 ‘교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먼저 공격하는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그렇게 성경의 해석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중 매우 중요한 것이 잇는데 ‘성경의 완결성’입니다. 이미 신구약 66권으로 종결된 복음의 완전성은 더 이상의 추가적인 성경 또는 새로운 메시아와 사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46절 모세를 믿으면 예수를 믿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모세가 바로 예수에 대해, 즉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하셨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글도 믿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야 말로 그들이 그렇게 핵심으로 여기는 율법을 받은 자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의 용도 인데 오래되었기에 우리 조상이 쓴 것이기에 유물처럼 고귀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여기 ‘나와 같은 선지자를’ 기억 해두시기 바랍니다.  6장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의 법칙 아래 자신을 두셨습니다. 배고프시고, 졸리고 약했습니다. 그래서 2-3일이 걸리는 십자가 처형의 죄인들과 달리 예수는 6시간 만에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약한 체력의 소유자로 3년의 공생애 동안 갈릴리와 유대를 오가셨습니다.  노숙하고 쉴 곳이 없어 돌을 베고 잠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신가?라고 묻는 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당연히 믿음은 지금 듣고 있는 사도 요한의 복음을 통해서 여러분의 이성에 완전한 동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경의 말씀이 이해되도록 믿음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오늘 부른 찬송 ‘내가 예수를 믿어’는 믿음의 주체는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로봇의 프로그램처럼 바꾸고 입력하는 방법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애하듯, 인류 역사에 관계하신 정리된 구약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고 인내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연인에서 남주의 사랑에 화답하지 못하는 길채를 바라보면 애타다 못해 속 끓는 여러분들이여 . 롬 8.26을 같이 읽으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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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본 설교는 초안 작성 후 적당한 내용이 정리된 상황에서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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