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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지지난주 오래된 병을 고침받은 이를 통해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님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함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결과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의미로 충분히 해석되도록 행동하신 것입니다. ‌19절에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 것은 앞선 1-18절까지의 내용이 ‘그러므로’를 통해 정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즉. 18절에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두번을 말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라고 말씀드렸죠. 이러한 표현은 말의 진의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즉 하나님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시되’ 라는 방식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도 말씀드렷지만 기억나지 않으실 겁니다. 마치 복면가왕에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말하는 투나, 습관을 통해서 유추하듯이 예수님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패턴이 유추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것을 일의 관계에서 먼저 본다면, ‌20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왜 일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의 관계까지 연결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치 공식을 외우듯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명제적인 접근만으로는 우리에게 와 닿지 않습니다. 마치 저의 설교가 어려운 이야기로 가득차 여러분들이 집중하고 들어야 이해가 되는데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귓속말이 더 잘 들리는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는 의도를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  지난주 사랑의 수고라는 의미를 설명 드렸는데 잊어 버리셨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무엇입니까. 사랑이죠. 왜 그런가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할 때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 사랑인건 알겠어요. 그죠. 그런데 왜 사랑만 남죠. 하나님 나라의 입성을 위해서는 믿음, 소망이 필요해요. 믿음은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결단하게 하고 소망은 힘을 공급해서 하나님 나라에 다다르게 하는 것죠.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면 믿음과 소망은 역할이 다 끝났어요. 하나님의 사랑만 남는 것 즉 그래서 그중에 제일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어디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것은 창세기에서 그 지으신 것을 보고 심히 좋았더라라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너는 저 사람이 뭐가 그렇게 좋아. 때론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만 사랑은 그 사람을 보게하고 향하게 하잔아요. 예수께서 지금 아버지의 일을 하는 이유가 사랑의 관계 때문입니다.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큰일을 보이사.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21절에 죽은자들을 일으켜 누가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데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립니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합치되는 것이죠. ‌더욱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아들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경배의 대상의 합당함은 심판에 대한 권한까지도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권한은 권한을 주는 자의 몫입니다. 너 이것까지만 해라고 할 수 있는 권한, 그렇다면 그 권한을 넘어서는 것을 우리는 ‘월권’, 직권을 남용했다라고 말합니다.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의원에게 주는 권한,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수반과 선출된 공무원들이 갖는 권한, 시험을 통해서 공무원이 된 이들이 갖는 권한은 법이 주어진 권한을 넘어서면 엄격하게 처벌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심판의 권한까지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일들은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즉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성령님을 경배하는 삼위일체적 신앙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24절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구조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먼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하나됨입니다. 그리고 넓게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예수께서 하신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듣는’ 것은 ‘나 보내신 이’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믿음은 어디로 연결 되어야 한다구요. ‘나 보내신 이’ 왜 보내셨는가? 구원입니다.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 앞선 말씀에서는 ‘심판에서 심판 받지 않음’,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죠.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게 예수의 말을 듣고, 보내신 하나님을 믿을 때, 1) 영생을 얻는다. 구원받는다는 요한복음식 표현이죠, 2)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3,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옮겼다는 말은 완료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선 ‘듣고’, ‘믿고’는 어떤 형태의 동사일까요? 듣고, 믿고는 지금입니다. 현재형이라고 하죠. 어떻게 가능할까요? 듣고, 믿는 지금이 이미 이루어주신 영생, 심판에 이르지 않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서 태양의 빛을 받는다면 그 순간 영향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아만 장군이 듣고, 믿고 일곱 번 씻을 때 나았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그 자체로 간단합니다. 하지만 듣고, 믿는 여기에 우리의 의심, 반대, 자기 생각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핑계와 버리지 못하는 자기 고집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25절 ‘진실로 진실로’로 시작합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죽음과 생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또 다른 시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마귀는 죽을 때까지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회피하고 생각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 즉 혈과 육으로 불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가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은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1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난하죠. ‘놀러 갔다가 죽었다 다만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 그런데 왜 국가가 세금을 써가면서 추모하고 그러느냐‘ 말의 논리가 한 문장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무엇이며 말도 안되는 이런 참혹한 현상은 무엇이며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전쟁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왜 일어나며 그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등 작게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과 크게는 이렇게 전쟁까지 ’죽으면 끝‘이라는 말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시초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존재는 흙이었으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 넣으심으로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대한 ’있음‘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헌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명을 나눈다‘ 그렇죠. 마치 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물 밖에 없듯, 피를 대체할 수 있는 것도 피 밖에 없습니다. 물과, 피 둘의 공통점이 묘하게도 ’생명‘과 직결됩니다. 물이 생명을 연장시킨다면 피는 생명을 연결시킵니다.

‌생명은 죽음과 연결되고 죽음은 심판과 연결됩니다. 즉 믿음 없는 죽음은 심판과 연결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출발한 생명은 아들에게로 아들에게 주신 생명은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믿음으로 신자에게 ’생명 있음‘으로 수여됩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은 같은 구조에서 나옵니다. 물이라도 바닷물은 죽음과 연결되고 피라도 다른 타입의 피를 수혈하면 죽음과 연결되듯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은 심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28절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심판의 시작입니다. 지락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나피디가 안유진하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고 합니다. 왜죠. 이름 세자를 같이 부르면 부모님이 혼낼 때 부르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본문 말씀의 백퍼센트 이해는 아닐 것이지만 유사합니다. 무덤 속에 잠자던 자도 분명한 음성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죽음이 현실적으로는 무덤이라는 곳에 이르지만 분명한 때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가 원하는 음성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 즉 생명의 음성듣기를 원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의 또 하나는 심판의 음성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  오늘 본문은 일종의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하시면서 왜 아들이며 그 아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직접 밝히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유를 모를 때 당사자가 이유를 말해주길 바랍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함정은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정해놓고 이유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이를 간파하고 듣고 싶은 말대로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면 대립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고치시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신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느냐 바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무엇인지를 직접 밝히시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렇게 들어도 ‘당장’ 우리의 마음을 심하게 울리는 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  하지만 4.16 세월호 참사, 10.29 이태원 참사 등 우리가 사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대형참사를 직접 목격하면서 불안전한 우리의 현실에 답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최근 자녀출산율이 0.78로 나왔고 세계의 모든 석학은 50년 안에 대한민국은 망하는 길을 가고 있다.라는 의견에 거의다 동의하였습니다. 물론 데이터만을 보면 그렇겠죠. 그래서 앞으로가 중요하고 바꿔야 한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그런데 정책을 수립하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다시한번 헌혈이야기로 마치겠습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듯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곳에서부터, 생명을 수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할 때만이 가장 올바른 생명있음의 현장이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태양의 빛 1프로가 지구 전체를 밝히듯 하나님이 예수를 통한 이땅의 생명 있음은 모든 분야에 자연적으로 미치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생명 있음이 저와 여러분 주변에 또 다른 생명 있음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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