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질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방법입니다. “너는 저 사람 어떻게 생각해?”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 시켜줄 때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한데 ‘너는 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입니다.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나 소개해주고 싶을 때 신뢰를 갖는 사람의 말은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는 의미가 되겠죠. 여러분이 오늘 집중해서 듣는다면 예수께서 어떤 믿음을 좋아하시는지 분명하게 알게 될 거라 자신있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1) 예수께서 빌립을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를 소개하고 3) 예수가 빌립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빌립은 예수가 직접 만나서 ‘나를 따르라’고 했는데 빌립은 특별한 내용이 없이 따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 여기에 무슨 정보가 있을까요? ‘빌립, 안드레, 베드로는 한동네 출신이니까, 나름 동네에서 호형호제 하면서 결속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베다니는 갈릴리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마치 김포의 풍무동 같이 말이죠 제자들 중에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또다른 시몬이 이 지역 출신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계속해서 ‘만났다’, ‘알았다’, 보았다 와보라 등과 같은 동사를 잘 활용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를 아는 말씀을 듣고 변화를 향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왜죠? 예수가 누구인신가를 알고 믿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로 호명 될때 만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부른 제자로 몇 차례 더 등장합니다. 6장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빌립에게 요한복음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12장에서는 헬라인 몇명이 빌립에서 ‘예수’를 좀 만나게 해달라. 이런 중간에서 비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하고 안드레와 함게 예수께 물어보는 장면, 14장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상황인데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렇게 빌립은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빌립은 적어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그리 믿음이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시작할 때의 빌립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두 번째, 빌립은 다음과 같이 예수를 소개합니다.
요한복음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1)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 모세오경 예를 들면 신명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8:15–18 (NKRV)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2)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 선지서 -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해로는 ‘구약’성경을 표현하는 말이 ‘모세가 기록한 율법, 여러 선지자’ 추가해서 ‘시편의 글들’ 이렇게 말하는 것죠.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 에스겔 등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많은 예언을 했습니다.
3) 그래서 빌립은 구약 성경에 말한 그분이 바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사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세 번째, 나다나엘에게 소개한 예수에 대한 나다나엘의 반응을 살펴보면
나다나엘도 나름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46절 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기본적으로 좋게 보기보다는 아무래도 안좋은 쪽의 표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구린 동네에서 메시야가 오셨다고 그건 예언과도 틀리잖아. 이렇게 말하는 거죠. 뒤에 나오지만 나다나엘도 ‘구약’에 대해 알았습니다. 빌립은 구약의 예언이 - 예수라는 인물로 인식되면서 ‘나사렛’이라는 지역을 뛰어 넘었지만 / 나다나엘은 그렇지 못했죠.
우리도 살다보면 뛰어넘지 못하는 내속에 그런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때는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결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죠.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배경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사귀다가 배경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야기도 그렇죠, 반면 아주 작은 사소한 그것 하나가 각자를 꼭 붙들고 힘들게 한다는 것이죠. 이걸 이르는 사자성어가 ‘자격지심’이라고 할 수 있죠.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곳에 꽂혀 있었죠. 그러수밖에 없는 것이. 구약의 예언이 ‘나사렛’이 아니라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오실 메시아는 베들레헴 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예수는 태어났고 거주지를 옮겨 나사렛에서 살았던 사실을 당연히 나다나엘은 알 수가 없었지만 요즘 말로 하면 ‘물어봐야죠’ 내가 알기로는 이러한데 왜 ‘나사렛’이냐라고 말이죠. 우리는 각자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이럴 것이다 라고 판단하면 대체적으로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가 뭘 믿는다. 할 때 믿는다는 의미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 즉, 바라는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바라게 합니까? 그냥 바라기만 하는 것을 상상이라고 한다면 생일날 뭐해줄까? 라는 말에 선물을 기대하는 것은 그 말때문에 바라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다나엘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48절에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평가는 비록 그가 아는 것에 한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거죠. // 저 사람은 참 법없이도 살 사람이야. 이런 말 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죠. 예수 믿는다는 믿음은 사람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수 있는 진정한 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신적인 능력입니다.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 안다 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 그 사람에 대한 기대나 관심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나, 소개할 때 마지막에 분명하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그런 사람이니 참고가 되길 바래’ 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자기를 어떻게 아냐’ 이렇게 말합니다. 살다보면 나를 정말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가치관을 바꿀 수 있어요. 문제는 좋든, 나쁘든이예요. 그만큼 나를 알아 준다는건 무서운 능력이라는 거죠.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간사함이 없다고 했잫아요. 세상에 사람들은 간사해서 상대를 아는 척, 사람을 분석하고, 행동을 보고 친구인척 반면 멀리하기도 해요. 며칠전 여러분께 영상하나를 소개했죠. 사이비 종교가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무서움이 바로 이런거예요. 간사하게 사람을 홀리는 접근 방법인데 한 사람을 여러 사람이 완전히 속이는 거죠. 마치 몰래 카메라처럼 말이죠. 그런걸 이용할 줄 아는 마음이 ‘간사’한 상태입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아시나요’ 했더니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라고 합니다. 미리 본거잔아요 그런데 뭐가 대단할가요? 장소적으로 지나면서 있던 것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구요. 여기에서 중요한데 예수께서 미리 보신 것과 간사함이 없다는 것을 잘 연결해야 해요. 각자는 마음에 간사함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날 봤지’, 자기식으로 자기에게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거죠. 누군가 나의 비밀을 알고 정곡을 꼭 찌르는 말을 하면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이야라고 인정하기 보단, 니가 나를 어떻게 안다고 그래, 봤어, 내 속에 들어와 봤어. 이런 반응이 당연하것 처럼 말이죠.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예수의 말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 들여 자신의 마음을 바꾸다는 거예요. 사기를 칠 때, 보이스 피싱을 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의심 장치’를 꺼버리죠. 어떻게 끄나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거죠. 생각해보면 다 아는 거죠. 그런데 생각하지 못하게 정신없게 해서 순식간에 돈을 빼가는 거예요. 앞에서 빌립을 계속 살폈잖아요? 그런데 쉽게 바뀌지 못했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간사함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성경에 대표적으로 간사한 인물, 야곱처럼 말이죠. 아버지의 재산을 받고 싶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야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모습의 상태죠. / 우리는 이걸 이렇게 표현해요. ‘저 사람은 참 약아 빠졌어’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거야’ 바로 이런 사람들이 성공도 하고 돈도 벌고 그래요.
남에 말 절대 안 믿고, 꼬아서 보고,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법칙에서 나다나엘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말씀해주셨고 정말 그렇게 살고 싶었던 나다나엘의 애쓰는 모습 ‘무화가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는 진정한 의미는 사실 나다나엘만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거죠. 추측은 가능해요. 당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묵상하거나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토론하거나 했던 장소라고 했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그런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예수께서 알았다는 거죠. 그리고 나다나엘은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내가 널 봤다고 해서 믿느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나 ‘믿음’은 더 ‘큰 일’도 보게 하는 강력한 거야. 왜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 그래서 믿음이 어떤 작용을 하냐면 5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본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