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알고 있는본문 시리즈(1) 일용할 양식
꽤 많은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예화로 시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화는 이해되기 쉽게 하려고 사용하다 이제는 예화에 말씀을 맞추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성경 내용과 상관없이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는 전반적인 인식 때문에 많이 사용한 결과로 보여집니다. 또한 성도들은 기도할 때 ‘관용구’ 처럼 사용하는 표현들, 교회 다니는 분들의 가정이나 가게에 가면 선물로 주는 액자가 걸려 있는데 표현된 성구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 본문의 의미는 사라지고 ‘특정 성경구절이 관용구처럼 사용됩니다. 무엇보다 심한 경우는 기도할 때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2주간 살펴본 요한복음은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볼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을 다시 한 번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알고, 점검하는 것이죠. 은혜를 받으면 복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의 대표적인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 다니는 분들, 모태신앙인분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면서 마음의 뜨거운 경험 같은 걸 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은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만날 때 일어나는 반응이고 만나는 것은 지금처럼 말씀을 하나하나 살피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신앙을 살피면서 잘못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의 대표적인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요한 이유가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 이라는 문구만 써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을 마치 생활에 다양한 필요를 구하는 기도라는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주 기도문 자체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의미보다.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빼고 ‘주문’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마태복음을 살필 때 기회를 보기로 하고 오늘은 마6:11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를 살피면서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본문의 말씀을 둘로 나눠서 생각하는 데 앞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고, 뒷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서술이라고 합니다. 견해의 차이가 있으나 충분히 그런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공통된 하나의 주장은 주기도문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성경이 어떤 주장에 의거해서 판단되는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학자들의 주장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달라고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요. 라고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아닙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처음에 예화 이야기를 했는데요. 검색을 해보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예를 많이 듭니다. 특히 성경을 인용할 때는 남은 하루치의 양식을 엘리야에게 바친 이야기도 하고, 신약에서는 바울이 자족함을 배웠다는 예를 들기도 하고, 가난한 상태에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설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예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는 시대에 ‘일용할 양식’의 의미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돈이 필요하고, 말 그대로 ‘오늘’이라는 하루의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고, 아이들 학비, 교회를 개척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장사를 하면 수익이 나야하는 등 ‘필요하다’는 우리의 생각을 기반하고 있습니다.
먼저 6장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마태복음은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광야 시험을 받고 제자를 부르신 후 5,6,7장에 걸친 산상설교라는 아주 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면서 6장의 시작을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동 특히 구제할 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고 5절에 기도할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 이중적인 사람을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혼자 기도해라 6절/ 중언부언 (주문 외듯) 하지 말라 일종에 양을 채우는 기도 하지 말라는 거죠, 7절 그리고 나서 이렇게 기도하라 9절로 이어집니다. 16절에도 ‘금식할 때’도 나옵니다. =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구제, 기도, 금식을 이용했다는 것죠. 그런 말씀에 항상 모르게 해도 하나님께서 아시고 갚아주신다. 라는 말씀도 따릅니다. 문제는 주기도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재물에 대한 가르침’ 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다음에 19절부터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마6:24-26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8“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4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위 말씀의 결론은 ‘일용할 양식들을 구하지 말라’는 의미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마6:32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제는 정말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마6:30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에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호통 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분명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그 필요가 세상이 구하는 방식과 다르게,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연결되고 있습니다는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출16:4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양식을 내리시는데 이걸로 ‘내 율법 준행’여부를 확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만나를 가리키는 일용할 양식은 요한복음 첫시간에 했던 ‘하늘로 부터’와 잘 맞습니다. 만나는 하늘로부터 왔지만 매우 엄격한 의미를 갖는데 많이 거두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썩기 때문입니다. 출16:19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출16:20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출16:21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아침마다,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결과로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에 안드레는 예수께서 와 보라는 초청에 가서, 보고, 머물렀다는 동사를 설명하며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 우리 삶의 원리를 살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아침마다’,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이죠. 이런 말이 잇습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 미루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는 것도 분명 욕심이지만 많이 거두고 매일 해야 하는 ‘아침마다’를 안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한편으로는 오늘 안하면 내일하지, 성경도 이렇게 미루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말씀합니다.
잠24:30-34“30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33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34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아무튼, 신명기8:3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먹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루에 먹을 양 딱 그 정도면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진정한 삶이 있다는 것이죠.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은 난 저기까지 갈 거야라는 목표를 정하지만 실제 그 목표에 있는 사람은 계속 유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그날 필요한 것을 그만큼 채우며 살아갑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아 이것저것 채우려는 욕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가게 하는 것이죠, 먹는 것에 목적이 아니라 먹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준 것이 예수께서 사단에게 시험받을 때 입니다. 40일을 금식하면 배고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죠. 동물에게 일용할 양식은 말 그대로 먹는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동물의 세계나 다큐멘터리를 잘 보면 사자는 자기의 배고픔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일부러, 더 모으기 위해서, 재미삼아 하는 것이 아니죠. 반면 사람은 내일 먹을 것 까지 결국은 더 모으기 위해, 아니면 오늘 본문에 유대인들처럼 자신을 뽐내기 위해 일부러, 아니면 재미삼아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취하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거둘 때도 흘리는 것을 두라고 했고 밭의 일부를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죠.
세상에서 잘 살고 풍족하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는 놀라운 구원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질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외의 것을 구하고 혹시라도 그렇게 채워진 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등지고 세상 나라에 발붙이고 살겠다는 배신이 되는 거예요.
요한13:2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오늘 우리에게는 분명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용할 제한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길로 갈 위험성이 큽니다. 위험성은 지난 주 있었던 수많은 재해로 인한 생명을 잃은 안타까운 사실에서 위험성을 경고해주는 장치가 고장 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험성을 경고해주는 가장 중요한 장치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정말로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