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말 걸기 전에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어쩌면 친절의 변화된 시대상을 담고 있다. 상대를 알아주고 간섭해주고 말을 걸어주는 것이 미덕이라고 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매장에 방문한 고객에게 이것 저것 묻는 서비스에서 고객만 따라 다니며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서비스로 이제는 무인 매장까지(물론 상황도 있겠지만) 나왔다. 잘 알려주려는 마음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려는 마음에 그럴 수 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에 대해 '분명한 싫음'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충분히 알고 있다. 나를 위하는 것은 곧 내가 원할 때 내가 물어보거나 내가 의사를 표현할 때 말하라는 것이다. 서비스는 지극, 극치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니 상황이 바뀌면 그 역할을 자기도 누려야 하는 것이 정상인 시대이다.
어제 뉴스에 배달 노동자가 어느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허락을 받고 화장실을 쓰자 사장이라는 왜 허락도 없이 쓰냐고 했다. 일하는 사람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오로지 '내가 사장이다'라고 주장만 되풀이 했다. 분명 그 사람은 자기 매장에서 고객들에게 이런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사장 나오라고 하세요', '사장이 누구예요' 말이다. 이제 상반대는 입장이 되자 다른 말은 필요없이 '내가 사장이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교회는 어떨까?
요즘은 방문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알아서 등록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그런 후에 등록을 하면 그때 말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역시 일종의 서비스가 되는 셈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구원을 값싸게 팔기 위한 서비스' 말이다. 심방도 없는 시대, 심방을 할 수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이다. 상대를 알고 그래서 접근했던 시대는 이미 끝났는데도 교회는 그때에 빠져있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열어야 할까? 아니 교회가 그런 서비스가 필요한 곳인가?
그래선지 3개월 설교를 들어보고 결정하고 6개월 다녀보고 결정하고 그런 결정은 매년마다 계약을 하듯 결정을 한다. 우리는 말을 걸어야 하는 특징을 가진 종교이다. 건너편 종교는 자기 참선으로 문을 열기에 말을 걸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반면 기독교는 말을 걸어오는 종교이다. '아담아'라고 말을 걸어오시고 '아브라함'라고 말을 걸어 오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알아서 할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