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교회에서 중등부 아이들과 수련회에 와 있다.
오랫만에 옛 생각도 나고 아이들의 기도하는 모습도 너무 아름답고 그렇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말로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찬양과 말씀..
전통적으로는 찬양이 ‘부’였고 설교가 ‘주’였다.
지금은 반대로 찬양이 ‘주’가 되고 설교는 일부에 녹아있다. 굳이 좋게 말하자면.
대상이 아이들이기에 그럴 것이다. 시대가 그러니 그럴 것이다. 사실 그것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긴 찬양의 시간에 그리고 자기 간증으로 자신이 발견한 보화를 전하듯 하는 인도자 - 찬양 사역자이면서 목사이다- 아이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나 형식의 파괴 그럴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찬양, 아이들도 귀 아파할 정도의 세션이나 고성에 가까운 인도자의 출중한 실력. 뭔가 생각이 복잡하다.
내게도 물론 그런 시간이 있었지만 수련회에 가면 찬양, 설교, 기도 등 포멧의 변화없이 그럼에도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여전히 그렇다. 물론 그렇게 하면 은혜 받는 이들도 있다.
참석하는 친구들을 들여다 보자.
중학생들이다. 묻고 싶다. 우리 때에 은혜받았던 방식을 전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은혜 곧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인지 말이다. 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고 한다.
아이들은 따라 부른다. 그런 사이에 기존의 사람들은 - 교사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잘 적응한 소위 신앙있다는 친구들- 잘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보고 배우면서 체험한다는 식이라면 말은 된다.
사실 우리 시대에는 - 20, 30년전 - 그랬다. 말씀사경회, 수련회가 더 맞을 것이다. 이제는 찬양을 중심한 젊고 노래에 자질이 있는 목사 사역자들이 이런 학생 수련회를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영역이 되었다. 신대원 3년에 독립교단에서 목사가 주어지고 목사가 된다. 그리고 특별히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찬양사역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같이 교회 찬양 사역자들에게 푸대접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결코 나쁘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데 정말 이게 맞을까?
아이들에게 예전의 방식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그 방식대로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내가 목사가 되고’, ‘내가 사역자가 되고’ 했으니, 나를 기준으로 하면 성공한 수련회이겠지만 그럼 그런 소수를 제외한 이들은 들러리인가? 아마도 설교를 못듣는 이들에게 찬양이 접근이 쉬웠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실력있는 가수 수준의 이들이 목사가 되고 찬양을 중심 하면서 실력을 뽐내는 자리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집회에 과연 다함께 주님을 만나는 잔치라 할 수 있을까?
찬양의 실력 만큼이나 설교로 준비된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나오는 말들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하면서 맥락도 맞지 않는 말씀을 텍스트로 아이들에게 사용한다. 예화는 성경과 연예인 등 가리지 않고 넘나든다.
일반적인 예를 들어보자.
김제동이 진행했던 톡투유인가? 거기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자신의 이야기를 질문하고 전문가가 답을 하고 서로 호응하며 격려 해준다. 결국 함께 사는 힘을 얻고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이 서로 소통한다. 우리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만져보고 생각해 보는 방향은 왜 없는지 모르겠다. 아니 참여하는 아이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준비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말을 배우듯 기도를 배우지 못한다. 그러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고 외친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의미를 알고 있는 사역자들인지 묻고 싶다. 나에게 맞았다고 너에게도 맞는다는 것은 결국 주장하는 자세다.
명 설교자가 그저 자신의 지식을 몇몇이 알아 듣는 유창한 설교문을 원고 없이 줄줄 읊어대는 것이나 자신의 재능인 목소리나 가수 못지않는 음악적 기교와 훌륭한 세션을 사용하지만 도무지 듣고 있는 청중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기술이지만 동일한 것이다. 이부분이 제일 걸린다. 솔직히 좀 짜증이 난다.
예수님을 보자.
주님은 자신을 찾아온 오천명의 배고픔을 돌아보셨다. 늘 청중의 상황을 살피셨고 그 상황을 잘 이해하고 깨닫도록 이끌어 주셨다.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이라는 말로 ‘위에서 남’과 ‘다시’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수’를 통해 ‘생명’과 ‘목마름’으로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 곧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결국 그 말씀 앞에 있는 청자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한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받게 되어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아이들이기에 이끄는대로 이끌림을 받는다. 그것이 어느 방향이든 말이다.
내 생각에
복음의 본질은 바뀔 수 없다.
그렇다고 전하는 방식을 시대의 흐름에만 맞추려 하거나 전통 만을 고집하는 극단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